오월의 아사코

오마쥬(Hommage)는 존경(respect), 존중을 뜻하는 프랑스에서 유래된 중세 영어이다. 오늘날엔 흔히 예술과 문학에서 존경하는 작가나 탁월한 작품을 흠모한 나머지 아주 약간의 변용을 거쳐 유사한 작품을 일반대중이 감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오마쥬라 일컫는다

영화에서는 애정이 가는 선배 영화인의 감명깊은 주요 대사나 장면을 본떠 표현하기도 하고

음악으로 따지면 정도에 따라 sampling혹 각색이라는 이른바 다른 조명으로 비추어 보는 편곡정도가 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서 패러디와 구별되고 원본을 밝히므로 또한 표절과는 구분된다 하겠다.

나만의 경우인지 모르겠으나 봉숭아 학당의 맹구처럼 나는 늘 신데릴라와 콩쥐 팥쥐의 이야기를 구별할 줄 모른다 아이가 어렸을적 잠자리에서 들려주던 이야기도 일쑤 콩쥐 팥쥐로 시작했다가도 곧잘 신데릴라로 끝나곤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나에게는 그런 경우가 또 하나 있는데 거문고 아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있는 금아 피천득 선생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내용인즉, 인연이라는 수필집에 나오는 아사꼬 이야기와 역시 같은 책에 연작으로 수록된 <오월>이 내게 바로 그러한데 이야기의 줄거리로서는 아사꼬를 그리고 그 배경으로는 바로 <오월>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그런 경우가 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선생의 또 다른 작품 <만년>이라는 수필까지 버무려져 마치 한 작품으로 기억되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경우에 따라서는 미당의 시어까지 동원되는 등, 일관이 없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하나로 이어지는 특유의 허구적 임팩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신록의 계절 오월을 맞아 늘 마음은 신록의 잎파리속에서 빛나는 햇빛처럼 일렁이면서도 학창시절에 읽었던 선생의 수필, <오월>이 너무도 나를 압도하여 나만의 감상과 느낌을 글로써 표현하는데 늘 실패하곤 했다 그렇치만 재주없는 나도 이제 오마쥬라는 장르에 의지해 그동안 주눅들었던 나만의 오월에 대한 감상을 용서가 된다면 선생의 재주에 살짝 얹어 우리의 아사코를 기억해봐야겠다

오월은 찬물 방울 튕기며 금시라도 세수를 한 애띤 얼굴, 앵두와 딸기의 달이며, 낯달 같은 모란의 달이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고 여유롭다. 그 앙징한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초록이 되고 초록은 어느덧 지쳐 단풍이 될 것이다

원숙한 여인네의 허리인양 녹음이 우거지고 이렇듯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이려니 이제 우리가 그 오월속에 있으니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랴!

이제 이부분에서 이야기의 줄거리인 아사꼬의 이야기가 드디어 내 기억속에서 회상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의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늘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오월이었다.아사코는 어느덧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처럼 청순하고 세련된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했고 헤어질 때는 아쉬워하며 가벼운 악수를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으며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동란을 겪었다 마지막으로 동경을 들렀을 때 놀랍게도 아사코네 동네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시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사내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와 살고 있었다 아사코 어머니의 안내로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뾰족 지붕에 작은 창문들이 있는 집,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에 나오는 집도 그런 집이었다. "오빠!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그래!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지도….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여년이 더 지났으며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아사코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였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일본에 주둔한 미군장교임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내였다

사람은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며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정녕 아니 만났어야 옳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더러 내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 본적이 있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이이는 진실로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신록의 잎파리속에서 빛나는 햇빛처럼 일렁이면서도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고 여유롭다. 그 앙징한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초록이 되고 초록은 어느덧 지쳐 단풍이 될 것이다

항용 원숙한 여인이 그러하듯 녹음이 우거지고 이렇듯 머문 듯 가는 것이세월이려니
그래도 우리가 그 오월속에 있나니 내 이제 나이를 세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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