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9세의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스티븐 옴스테드(Steven Olmstead·85·사진) 이병. 1948년 미 해병대에 사병으로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한 옴스테드 이병의 입대 동기는 간단했다. 그의 고향인 뉴욕주 알바니의 한 해병대 징병소에서 근무하던 하사관이 한 말이었다. “내가 너를 지도자로 만들어 주겠다.” 

평소 더 큰 세상을 보고 싶고 남과 다른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던 소년 옴스테드는 그날 바로 입대 원서를 작성하고 이등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기본군사훈련을 마친 그는 1950년 9월 일본에 배치됐고 10월 한국 원산에 상륙했다. 9일 워싱턴 중앙일보사를 방문한 옴스테드 장군은 “한국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지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나는 이병이었기 때문에 하라면 하는 게 내 임무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우리들이 투입됐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8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의 풍채는 꼿꼿했고 기억은 또렷했다. 그는 직접 가져온 지도를 펼치고 65년 전 그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곳의 지명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원산에 투입된 옴스테드 이병이 속한 부대는 미 해병 1사단이었다. 미 해병 1사단은 미 10군단과 함께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는 부대였고 중공군의 한국전 불법 개입 후에는 장진호에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흥남 철수를 가능케 한 부대다. 

옴스테드 장군은 “지휘관이 전쟁을 지휘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게 세 가지가 있다. 적군, 날씨, 지형이 그 세 가지인데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던 전투가 장진호 전투였다”고 말했다. 중공군의 수가 10배 이상 많았고, 기온은 영하 35도를 기록, 얼어붙은 장진호 부근의 산악 지형은 미 해병 1사단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포위됐을 당시 제대로 된 식량 보급이 이뤄지지 않았고 며칠 간 지속된 중공군과의 교전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었다. 막사도 없었고 침낭 하나 들고 추우니까 트럭 밑에 웅크리고 선잠을 자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1950년 이병(좌)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청년 옴스테드는 1986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19~20세에 불과했으니까 젊은 패기가 있었고에 있는 동료들이 서로를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2차세계대전을 경험했던 분대장급 지휘관들의 통솔력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답했다. 그가 군 생활 중 가장 존경하는 군인은 맥아더 장군이나 여느 고위 장교들이 아닌 분대장급인 병장이나 하사관들이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에 도착한 그는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배가 사람으로 가득 차 누울 공간도 없었다. 3일간 어떻게 이 배를 타고 가나 하는데 군함에서 일하는 민간인 정비공이 ‘잘 곳 없으면 이쪽으로 와’라고 해 정비공이 생활하는 곳에서 편하게 왔다. 몇 달 만에 제대로 된 잠을 자봤다”고 회고했다. 

부산을 거쳐 마산에 주둔하던 옴스테드 이병은 1951년 4월 미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지휘관들의 추천으로 장교로 임관하라는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버지니아 콴티코 해병대 기지에서 1951년 6월 소위로 임관했다. 

1986년 중장으로 예편한 옴스테드 장군은 현재 버지니아 콴티코 기지 인근에 장진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는 단체의 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미 해병의 3대 전투로는 1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있었던 벨로숲 전투, 2차세계대전의 이오지마 전투, 그리고 한국전의 장진호 전투를 꼽을 수 있다. 아직 장진호 전투만 제대로 된 기념비가 없다”고 건립 추진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밀어냈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후퇴 작전인 흥남 철수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물론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만의 성과가 아니다”라며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사격이 없었으면 포위망 돌파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국제사회가 한 집단에 대해 ‘도를 넘었다. 우리가 멈출 것이다’라는 취지로 참전한 전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목표를 달성했는가는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일이지만 스탈린 등 공산주의 확산 세력에게 따끔한 경고를 한 전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끔 한국전쟁과 관련해 ‘그럴 가치가 있었나’라는 질문을 많이 듣는데 기가 막힌다”며 “높아 봤자 2~3층짜리 건물뿐이었던 국가가 세계 경제 대국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한미 양국 간의 동맹과 사람 간의 교류를 봐라. 나 역시도 크리스마스 엽서를 서로 전하는 한국 친구들이 아직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쟁 이후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는데 전쟁의 폐허에서 지금의 성장을 이뤄낸 한국을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알게 된다”고 덧붙였다. 버지니아 애난데일에 거주하는 옴스테드 장군은 인근 골프장에서 우연히 흥남 철수로 살아 남은 피란민들을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 

미 해병대 이등병에서 중장까지 약 40년 간의 군생활을 한 옴스테드 장군에게 해병의 가치는 “규율, 조직, 동지, 임무”라고 한다. 콴티코 기지 해병대 박물관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을 숙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그는 영원한 해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