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히로시마 방문....평화 메세지는 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없어

피하출혈로 온 얼굴에 반점이 생긴 채 겁먹은 얼굴로 병상에 누운 소년의 사진, 살갗이 벗겨진 채 유령처럼 헤매고 있는 아이들 모습을 되살린 밀랍인형, 채 먹지 못한 도시락 속에 숯덩어리처럼 굳어버린 밥, 그리고 녹아내린 유리병들.


히로시마(廣島)시 평화공원 내 평화기념자료관(원폭자료관)에 남아있는 1945년 8월 6일(미국의 원폭투하일)의 기록은 처참했다.


지난달 11일 이곳을 둘러본 뒤 "인간의 감성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속이 뒤틀리는(gut-wrenching) 전시"라고 말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소감은 과장이 아닌 듯 했다.


마침 20여개 학교가 수학여행을 온 날이어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전시실을 가득 채운 일본 학생들은 둘로 갈렸다. 충격을 받은 듯 말없이 참관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극단적인 전시물들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듯 마냥 신기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외국인 참관자 몇명은 안타까운 마음에연신 혀를 찼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71년만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 방문(27일)이 발표된 다음 날인 1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아 오바마가 들를 만한 곳들을 둘러봤다.


이곳에서는 '2차대전 전범국가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라고 일축할 수 없는, 인류사의 유일하고 중요한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공원 전체의 테마는 평화에 대한 염원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헌화할 위령비에는 '편안히 잠드십시오.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테니'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 '원폭 어린이상'앞에서는 수학여행을 온 고치(高知)현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들이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 인솔한 교사는 합창이 끝난 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소감을 물었다.


종이학을 받쳐 든 소녀를 형상화한 원폭 어린이상은 2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뒤 종이학 1천 마리를 접으면 병이 나을 것으로 믿고 종이학을 접다 964마리를 접고서 피폭 후유증으로 숨진 사사키 사다코 양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전국 3천 200여개 학교와 9개국의 기부로 조성된 어린이상 앞에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상징하는 원폭돔(옛 히로시마 물산진열관) 앞은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1996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이 곳은 역사 공부의 장인 동시에 히로시마 최고의 관광자원인 듯 했다. 올해로 지은 지 101년 된 이 건물은 원폭의 충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지만 1세기 전의 일본의 건축기술력을 과시하듯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당시 아시아의 '수석 근대 산업국가'에 만족하지 않고 제국주의 열강의 길로 폭주하다 허무하게 패망한 일본의 근현대사를 원폭돔은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원폭자료관에서 5분 정도 거리의 다소 외진 장소에 한국인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었다.


강제징용·징병 피해자와 자발적 이주자 등 히로시마에 살던 조선인 약 8만명 중 5만 명 가량이 피폭했고, 그 가운데 2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 피폭자 박남주(84) 씨와 함께 가 본 위령비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과 달리 적지 않은 일본인 학생들이 찾아와 가이드나 인솔 교사의 설명을 듣고 갔다. 인솔 교사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찬찬히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오바마가 온다는 소식에 히로시마는 들떠 있었다.


택시기사 다카타니 씨는 "와서 어떤 말을 할지 모르지만 드디어 미국 현직 대통령이 온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고 소감을 말한 뒤 오바마의 사죄 문제에 대해 "그에게 (원폭투하에 대한) 직접 책임이 있다고 하긴 어려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원폭 자료관 경비 요원은 "기쁘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헌화만 하고 갈지 모르지만 자료관을 꼭 다녀가면 좋겠다. 그때 어떤 상황이었다는 것은 보고 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평화공원에서 만난 교사와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하루동안이나마 평화의 중요성과 전쟁의 참혹함을 제대로 느끼고 가겠구나 싶었다.


다만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를 온 세계에 알리는 평화공원에서 원폭이 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는 전시는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 아쉬웠다.


모든 전시물과 조형물이 평화라는 대주제를 일관성있게 표현하고 있어 감동적이었지만 자국 선조들이 어떻게 자국민과 이웃국가 국민들을 황망한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기자가 만난 시민들과 학생들 중 히로시마에서 식민지 조선인이 2만 명 가량 억울하게 희생된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으로 미일간의 화해는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을 지언정 아직 한일간의 화해는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로시마에서 직접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고, 장기 집권 가도를 달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평화헌법 개정을 꿈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질 오바마와 아베의 히로시마 동행이 일본과 국제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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