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가 워싱턴 정가에 남긴 것 그리고 버니에게 남은 것

지난해 4월 미국의 73세 노정객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출마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잠시 얼굴을 비쳤다가 사라질 줄 알았다. 민주당 인사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언론들이 민주당 대선후보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경선인 워싱턴시 경선이 끝난 14일(현지시간)까지, 샌더스는 1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성취를 이뤘다.


샌더스는 22개 주의 민주당 경선에서 클린턴을 이겼다. 1000만명 이상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공공육아, 유급 가족휴가, 보편적인 건강보험, 공립대학 교육 무상화 등 국내정책의 개혁을 대선 화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클린턴은 무역 자유화, 최저임금, 건강보험 등 중요 공약을 거듭 수정해 원래보다 상당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샌더스는 740만건의 개인 소액기부에 의지하면서도 월가 금융기관들과 대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은 클린턴보다 정치자금을 많이 모았다. 돈과 조직력을 가진 민주-공화 양당구도는 깨지지 않는다던 미국 정치에서 시민들이 주도하는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무슨 수든 트럼프 당선 막을 것”


샌더스는 경선에서 패하더라도 민주당에 남겠다고 전부터 말해왔다. 적어도 11월 본선 때까지 제3당을 만들고 나서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4일 워싱턴시 경선에서 클린턴은 78.7%를 득표해 21.1%를 득표한 샌더스에게 압승을 거뒀다. 샌더스는 그 직후 클린턴과 워싱턴에서 만났다. 각자 참모 두 명만 배석시킨 비공개 회동이었다. 만난 뒤 양측은 아무런 논평을 내지 않았다. 샌더스는 회동 전 기자회견에서 선거운동을 조만간 접거나 클린턴 지지를 선언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전당대회 때까지 클린턴과 민주당이 진보적인 의제들을 얼마나 수용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클린턴의 선거본부장 로비 무크와 샌더스의 선거본부장 제프 위버 등 실무자들 간 소통이 계속돼왔다. 클린턴은 지난 7일 캘리포니아 경선 뒤 샌더스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소득증대, 불평등감소, 계급 상향이동에 대한 우리 논쟁은 민주당과 미국에 매우 좋았다”며 감사 인사를 건넸고 그날 이후 샌더스의 메시지는 한층 누그러졌다.


하지만 샌더스가 클린턴을 도우면서도 비판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 샌더스를 지지해온 주간지 더네이션은 최근 사설에서 샌더스가 상원 재무위원장을 맡아 대선 이후 진보적인 민주당 주도 정치를 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제 샌더스에게 남은 싸움은 7월 전당대회 때까지 자신의 공약을 최대한 많이 민주당의 정강·정책에 반영하는 것이다. 패배를 언제 공식적으로 인정할지는 전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CNN 앵커 제이크 태퍼는 지난 5일 인터뷰에서 샌더스에게 “ ‘버니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말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지지자들의 열광을 우회적으로 비꼰 것이다. 샌더스는 “내가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지지자 수백만명을 일렬로 행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노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대선후보에 지명되지 못할 경우 지지자들을 설득할 책임은 클린턴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가 전당대회 때까지 클린턴 지지를 선언하고 반트럼프 전선에 나서면 샌더스 지지자들 대부분은 클린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5월 중순 뉴욕타임스·CBS 여론조사에서 샌더스 지지자의 72%가 클린턴을 찍겠다고 했다. 2008년 비슷한 시점에 클린턴 지지자들 중 버락 오바마를 찍겠다고 밝힌 사람이 60%에 불과했던 것보다 오히려 많다.


■‘민주당 점령’인가 ‘제3 정당’인가


샌더스 본인은 경선 후의 계획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지자들 사이에선 토론이 활발하다. ‘민주당을 점령하라(Occupy Democrats)’는 움직임을 보이는 쪽에서는 민주당의 경선 규칙과 정강·정책을 바꿀 가능성을 높게 보면서 당내 개혁을 주장한다. 미국통신노조 위원장을 지낸 래리 코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샌더스가 전당대회까지 가서 당 간부들로 구성된 당연직 대의원인 슈퍼대의원 제도를 폐지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더스가 민주당에 남아서 완수할 과제에는 슈퍼팩(PAC) 의존을 끊는 일도 있다. 슈퍼팩은 기업 등이 주는 돈을 무제한으로 받을 수 있는 선거자금 법인이다. 샌더스는 슈퍼팩 정치자금 때문에 정치가 1% 부자를 위해서만 작동하고 나머지 99%를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며, 슈퍼팩 없이도 대선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줬다.


‘민주당 점령’ 진영은 이미 작은 승리를 거뒀다. 정강·정책 위원회 위원 15명 중 5명을 샌더스 진영 사람이 차지했다. 민주당전국위원회(DNC) 위원장이 위원을 선정하게 돼있던 것을 5월에 클린턴 캠프와 협상해 바꾼 것이다. 클린턴은 6명, DNC 위원장 데비 와서먼 슐츠는 4명을 지명하기로 했다. 샌더스는 정강·정책 위원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지금도 클린턴과 씨름 중이다. 그럼에도 188년 역사의 기성정당을 내부에서 바꾸기는 쉽지 않다. 샌더스를 지지한 풀뿌리 지역 정당인 ‘노동하는 가정당(WFP)’의 댄 캔터 사무국장은 “민주당을 점령할 수는 없다. 안에서 뭔가 해보려다가는 오히려 민주당에 점령당할 것”이라고 더네이션에 말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 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11월 대선 이후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어 샌더스의 정치혁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자본의 이해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를 건설할 수 있고, 2018년 의회 선거와 2020년 대선을 위한 인재들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비영리 정치매체 ‘트루스아웃’에 따르면 2012년 대선 때 민주, 공화 양당이 쓴 돈 70억달러 중 30% 가까이가 3만여명, 즉 상위 0.01%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 샌더스는 소액 기부만으로 당내 경선을 치르면서 제3당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물론 샌더스가 민주당이 아닌 독자후보로 나왔을 경우 이런 성취를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샌더스현상’은 이제 민주당의 도움 없이도 정치 활동을 이어갈 정치자금 모금 인프라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피플 포 버니’를 설립한 찰스 렌치너는 “생각을 조직하려면 정당이 필요했고 그 생각을 퍼뜨리려면 신문이 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후보가 선거판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트럼프처럼 리얼리티 TV쇼를 지렛대 삼거나 (우리처럼) 소셜미디어를 통하는 대안이 생겨났다”며 디지털 선거가 전통 정당의 틀을 허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피플 포 버니’가 1년2개월간 소셜미디어에서 했던 공유, 댓글 등 상호작용만 25억건에 달한다.


샌더스는 11월 대선과 함께 치러질 의회 선거와 2018년 의회 선거를 노리고 ‘샌더스 키즈’로 불릴 수 있는 차세대 정치인들을 밀어주는 역할도 계속하고 있다. 언론의 관심은 클린턴이냐, 트럼프냐에 쏠려 있지만 샌더스와 지지자들은 11월 대선 뒤부터 더 중요한 싸움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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